<노서아 가비>



어제는 아차산엘 한시간반쯤 갔다왔고, 오늘은 산길을 걸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왔다. 너무 오랜만에 도서관엘 갔더니 서먹서먹한 느낌까지 들었다. 책몇권을 주섬주섬 챙겨선 강이 보이는 창가자리에 앉아 한시간쯤 뒤적거리다보니 예전의 편안함과 익숙함이 되살아난다. 좋았다.


다시 서가를 돌아다니며 책을 골랐다.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와 살만 루슈디의 <분노>를 빌려왔는데, <분노>는 얼마전 해리랑 카톡으로 얘기하다가 들었던 책이라서 나도 따라 읽고 싶어진 책이고, <노서아 가비>는 탁사마스러운 커피이야기여서 가져왔다. 산길로 도서관엘 가고 집으로 올때는 강변을 따라 걸어왔는데 오늘 바람이 불고 날씨는 차가웠다. 정신이 번쩍들게 차가운 날씨는 내머리를 깨어나게 해주었는데, 강물은 천연덕스럽게도 마치 봄날인양 반짝거렸다.




하루종일 시간이 남아돌아서 가벼운 소설인 <노서아 가비>를 다 읽었다.


 



커피를 좋아했다던 고종황제 이야기와 사기꾼으로 묘사한 따냐의 이야기를 김탁환스럽게 버무렸는데, 요즘 커피에 점점 몰두하고 있는 나여서인지 충분히 공감가는 스토리였다. 가벼워서 두어시간만에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좋고, 그 시절 러시아 커피를 마셨다면 여기서 묘사한 대로 마셨을것이다.


가정용 로스터를 살까말까 망설이고있는데 불이 확 지펴지는 심정이다. 만일 로스터를 갖게되면 블루마운틴 생두를 사서 볶을테고, 예가체페와 블랜딩해서 마시면 되는걸까?  커피를 배우면 더 집착하게 될까봐 아무렇게나 마시고 있었는데 그쪽으로도 점점 더 기울어진다. 재작년에 캔디가 집에서 로스팅해서 갖다 준 블루마운틴의 그 쌉싸름하던 깊은 맛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카페에서 주문해마시는것보다 블루마운틴 함량이 훨씬 높았겠지.. 내 입맛대로, 딱 맞게.


몸이 기억하는건 의외로 집요하다. 어떤 작은 갈고리가 방아쇠역활을 하면 몸은 예전에 있었던 기억과 그때의 기분과 슬픔, 향기, 그당시 상황에 처했던 내맘까지..많은것을 순식간에 불러온다. 괴로울지경으로 세세하게 환기시킨다. 가끔 궁금하다. 언제까지 이럴수 있을까. 나이들면서 잊혀져가는건 내 삶의 어떤 사진일까.. 그래도 남아지는 사진들과 감각들은 또 어떤 것일런지.. 일년이 더 넘은 그때의 커피맛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 그 맛은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커피는 언제나 첫사랑이고 (p.31)
커피는 두근두근, 기대이고 (p.93)
커피는 오직 이것뿐! 이라는 착각이고 (p.157)
커피는 끝나지 않은 당신의 이야기다. (p.233)


아침에 일어나서 검고 진한 커피를 마시는 습관을 버려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침마다 갈등하고 결국엔 실패한다.
옛날부터 마셨다잖아..식전에 두세잔씩. 뭐어때.

커피의존증 환자에게 핑계꺼리를 주는 책, <노서아 가비>.  



#덧1.
우연히 집어 든 책이었는데..남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해 검색했는데, 3월 15일에 개봉하는 영화 <가비>의 원작 소설이라니...거 참. 따냐가 '바리스타'란 생각은 미처 못했건만 고종황제의 전속 바리스타 맞네..

가비(커피)를 곱게 빻아 그날의 습도와 기온에 따라 손으로 적당량을 찻잔에 넣고 그 양에 맞춰 감으로 설탕을 넣어 뜨거운 물을 부어 기다렸다가 가라앉힌 가비를 고종황제께 올렸다...는 표현이 기억난다. 제대로 된 바리스타였었네..순전히 감각에 의지해서 그 날의 커피를 만들었을테니 말이다.

이런 방식의 커피는 발리에서 사 온 원두가루로 마셔봤는데, 그 입자가 하도 고와서 저렇게 가라앉혀 마실수밖에 없었고 독특한 진한 맛의 커피였던 것도 기억났다. 핸드드립도 에스프레소 추출도 불가능할 정도의 고운 입자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