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

 

 

1.

시험기간이 정신없이 바쁘기도하지만 그기간중엔 수업이 한개도 없이 오롯이 내게 떨어지는 그런 하루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 통째로 비어버린 하루를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아침부터 채워놨지만 한 친구의 사정으로 약속이 취소되고 새로운 일정도 없이 빈둥거릴 수 있는 뜻밖의 시간들. 대충 미뤄놓았던 종이신문들을 뒤적거리며 분리수거를 하던 중 읽고 싶은 책 두 권을 목록에  올려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노라 에프런 감독의 타계로 일괄정리하는 한 지면에서 그녀의 에세이집을 소개받는다.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 I Remember Nothing )>. 로맨틱 코메디 영화를 좋아하는데, 특히 좋아했던 <유브갓 메일>의 감독이 쓴 마지막책. 나이드는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생각할꺼리를 많이 주는 주제이지만 특히 여자에게는 나이들어서의 중후함따위는 전혀 장점이 아니므로 세간의 농담으로 십대부터 칠십대까지 모두가 좋아한다는 '이십대여자' 시기가 지나고나면 나이..를 생각하면 묻어오는 쓸쓸함과 서글픔이 여자들에게는 아쉬움, 자포자기 기타등등과 공존한다.

 

나이들어도 괜찮다는 자신감 넘치는 얘기는 내게는 별로. 나이들면서 알게된 새로운 많은것들을 말해주는 시선이 필요했는데, 지면상 소개된 것만으로도 이 책이 내가 찾던 책이다.

 

그리고 강신주교수가 소개해주는 책. 에릭 오르세나의 <오래오래> 한권 더. 사랑에 관한 얘기라고 한다. 소재보다는 주제에 집중하고싶은 내용들.

 

죽을때까지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를 책 두권이 오늘 한가한 내게 걸려들었다. 책을 선택하고 그 책을 수중에 넣고 그리고 끝까지 읽어내는것과는 별개로 읽고싶은 책을 발견했다는 뿌듯함. 내가 가진 허세 중 한가지임을 인정.

 

큰 애 방에서 본 <하우 투 리드 라캉>을 찾으러 들어갔는데 오늘 들고나갔는지 눈에 띄질 않는다. 먹고싶은 거 바로먹는 심정으로 읽고싶었으나 그러지못한 보상으로 바로 주문들어간다.

 

 

2.

큰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요즘 이 아가씨는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있다. 직접 연극무대에 서고 싶어하는것도 배고픈 생활을 어느정도 각오해야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연극을 관람하는데 빠져드는것도 배고픈 생활을 하기는 매한가지다. <M.버터플라이>에 빠져 그동안의 저축을 탕진하는 기미가 보이더니 얼마전엔 <맨오브라만차>를 보고와선 헤롱헤롱. 매달 타쓰는 알량한 용돈과 시급을 받는 커피전문점에서의 몇시간 알바로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놨으니 생활고에 허덕이는 건 당연지사.

 

그러다보니 큰애는 일단, 집에서 나갈땐 밥과 고기를 든든히 먹고 나간다. 알바시간이 끝나고 나올때 그곳에선 시급보다 비싼 커피 한잔을 가격에 상관없이 '한 잔' 제공받을 수 있다는데, 커피는 그걸로 연명. 물론 집에서 진하게 에스프레소 내려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오전용 커피는 자체제공하고. 그리고 어쩌다 연극을 예매한 날이면 보러 가는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서 강남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읽는다. 이틀에 어떤책(제목을 말해줘으나 까먹음)을 다 읽을수있어서 책 한 권값 굳었다고 좋아라한다.

 

가끔 저녁값을 아낄 방책으로 알바끝날 시간즈음에 머핀을 '실수로' 태울까? 하는 궁리도 한다. 야단 한번 맞고, 망친거 저녁으로 먹을 요량으로. 헐.. 하긴, 그런 말들은 나 있는데서 나 들으라고 일부러 흘리는 대사들이다. 그러면 엄마가 불쌍한 딸에게 티켓 한 장 사주진 않나 간보느라고. 난..도시락을 싸주겠다고 맞선다. 직접 싸가든지. 냉장고의 재료는 맘껏 써도 된다고 아량을 베풀며.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연극이나 뮤지컬에 심취하는것도 일종의 허세..라고 생각하므로.

 

비평을 전공하고싶어하니 그 모든 공연 관람뒤에 제대로 된 글을 써서 어딘가 응모할 궁리도 하나보다. 혹시라도 운좋게 당선되면 티켓값을 확보할 수 있다나뭐라나.

 

나를 끌어들이려 부단한 노력을 하는중. 같이 보는 티켓값은 내가 지불할테니말이다. 그치만 난 어쩌다 한번이면 된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