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E 가 내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다.'에 해당되는 글 1

  1. 2008.09.01 생각지도 않게 <월.E>를 보고오다. 5

생각지도 않게 <월.E>를 보고오다.




일요일도 심심했다.


심심할때 발휘되는 내 특기하나는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맘에 드는 블로그를 '발견'해 내는것. 구독 블로그를 하나 늘리는것의 기준은 치열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거나, 촌철살인의 몇마디, 시니컬한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은 진짜 매사에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는 요즈음 어린 친구들의 모습들이다. 물론 긴 글은 기본이고 방대한양의 포스트 또한 기본. 스크롤바의 압박을 받으며 읽는것에 살짝 쾌감을 느끼는것같기도하다.


내가 스토커성향이 있나..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한 적 있다. 댓글도 안 남기고 글만 읽는다. 내가 댓글을 안남기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20대 중후반 또는 30대 초반일 그 친구들이 나같은 아줌마의 댓글이 그리 달갑지 않을거라는 나의 편견때문. 실지로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암튼. 진지하고 글 잘쓰는(이런 사람들은 대개 유머러스하기까지하다) 블로그를 하나 발견하고 오전내내 거기서 놀았다.


오후에도 심심했는데, 그래도 청소하고 이것저것하다보니 시간이 좀 지나갔다. 청소를 다 마치고나니 룸메이트가 운동하고 돌아왔고, 늦은 점심을 먹더니 아 글쎄..혼자서 스타벅스에 가서 사장님과 미팅할 내용을 정리하고 오겠다며 휙 나가버렸다. 어? 나도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마시며 책읽어도 되는데. 야!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가니? (물론 속으로만 궁시렁..-_-)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따라나서지도 못하고 게다가 약간 자존심 상해서 뒤쫓아가기는 싫었는데..원두커피가 떨어져서 내가 커피를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약간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두고보자.


저녁에 집에 왔길래 밥을 차려주고 비장하게 말했다.


"나, 나갔다올께"
"어디 가?"
"몰라. 그냥 혼.자. 나갈꺼야. 커피한잔 사들고 영화볼래."
"영화? 나도 볼래."
"사장님하고 미팅할꺼라서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해야한다며"
"아까 스타벅스에 가서 다 끝내고 온거야. 그러니까 나도 갈래"
"...........(뭐야..나 혼자 나갈꺼라구!!!).....알았어...-_- "
"근데 무슨 영화볼꺼야?"
"....(생각 안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사람이 절대 안 볼영화를 봐야지 싶어서..) 애니메이션 이야. 당신은 재미없을꺼야. 로봇들의 사랑 얘긴데..말도 거의 안할껄?"
"괜찮아. 당신 보는거는 나도 볼래"
"헐...(이사람이 드디어 젖은 낙엽족에 입문한건가?)"


이리하여.
월. E를 중년의 아저씨랑 봤다. 난 십대인 우리 아들이랑 볼 생각이었는데.


잠시 나의 룸메이트를 소개하자면, 이사람은 전형적인 대한민국 40대중반의 아저씨다. 권위적이진 않지만 보수적이고, 영업에서 10년쯤 굴러서 성격이 많이 둥글둥글해졌지만 원래 종가집 장손인데다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야말로 금이야옥이야 키워서 자기는 감이 익어서 떨어진것도 먹어본 적이 없다는 고백도 했었다. 직접 가지에서 따서 준거나 하나 먹을까말까 했다나? 과자 귀한 그 시골에서도 맛없는 과자는 그냥 버렸다고 했다. 까칠하기는.


그리고 <다크나이트>를 보고 이해못할까봐(실은 이상한 감상으로 나의 감동을 방해할까봐) 안데려갔었고, 그나마 영화를 보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영어를 생동감있게 들을 수 있다는것 정도? 나쁘다는게 아니라 나랑은 매우 다르다는 거다. 이사람은 현실적이고 나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막상 매표소앞에 서니 <맘마미아>가 생각보다 일찍 개봉해서 상영하고 있었는데 꿋꿋하게  <월. E>를 봤다. 영화가 시작됐는데, 그나마 시작하고 한 20분쯤은 아무런 설명이나 대사도 없이 영화가 진행이 되는거다. 절대 이해가 안가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집중하는 옆모습을 보니 너무 웃음이 나왔다. 이사람은 아이들 어렸을때도 같이 만화영화보러간적도 거의 없는 사람이다.


"무슨 내용인지 알겠어?"
"아니."


속으로 ㅋㅋㅋ 이러면서 웃다가 아주 간단명료하게 영화에 도움이 될만한 얘기를 해줬다. 소곤소곤.


(미래의 지구야. 쓰레기장이 되어버려서 다들 다른 은하로 이주해갔는데 청소해놓으라고 남겨진 청소로봇중 하나가 700년 동안 고장도 안나고 자기 일을 하다가 탐사로봇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야)


월.E는 정말 예쁜 영화였다. 그리고 슬픈 영화이기도했다. 700년동안 혼자 청소를 하다니. 낮에 혼자 청소한 아줌마입장이다보니, 생각만해도 가슴아프네. -_-;;


기계음을 내기 위해 굉장히 복잡한 녹음 과정을 거쳤다고 들었던 월.E와 이브의 목소리는 진짜 공들인만큼 근사했고,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하는 메세지도 명료했다. 픽사 에니메이션이라 누구나 보기에 거부감이 없고, 그리고 단지 렌즈모양인 월.E의 눈에 나타나는 감정전달도 훌륭했으며 이브의 이모티콘과도 같은 눈웃음 표정들도 좋았다.


그리고 또하나. 운동을 안하고 가상공간에서 살아가며 진화(?) 하는 사람들의 체형변화를 역대 선장들의 사진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운동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역설하고 있었다. 월.E가 법석을 떠는 통에 가상공간에서 미끄러져 현실세계를 접하게 된 존과 한 여자(이름이 나오든가 아니든가 기억안남)가 느끼는 현실의 불편하고 부족하지만 아름다운 느낌들도 점점 컴퓨터앞에서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경고의 메세지가 컸다.


나의 룸메이트는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모르겠는데, 처음엔 골탕먹이고 싶어서 선택한 영화였는데(물론, 난 무척 보고싶었는데 미뤄뒀었지만 이사람은 요즘 가장 잘나가는 다크나이트도 안 본 걸 감안하면), 앞으론 감성을 재성장시키는 차원에서 종종 같이 봐야겠다. 중간에 살짝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맘마미아>볼껄 그랬나봐.."했더니, "그것도 또 보자~" 이런다. 음..쫌 무서워질라 그런다.


어쨌든 내가 하는 모든것에 동참하고자하는 굳은 결의를 읽을 수 있었는데 이제 많은 결정권이 나에게 넘어왔다는걸 강하게 느낀다. 으하하하.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