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을 떠날때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것은, '읽을꺼리'가 떨어지는 일이다. 만일 나라밖 여행이라면 매우 심사숙고해서 책을 고르는데 항상 두권 이상을 챙긴다. 혹시나 내가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된 활자를 속터져가며 읽게 될까봐서.
내가 영어책을 자발적으로 읽은 경우는 [해리포터] 번역본이 아직 미처 나오지 않아 영문판을 끼고 더듬더듬 읽어야 했던 경우다. 이경우에도 일단 1권이 나오면 그거 사다 얼른 읽고 다음 2권이 나올때까지 그 뒤의 챕터를 이어서 읽었다. 가히 눈물 겨웠다. 나의 짧은 영어독해실력때문에.
나의 그러한 유전자는 큰애가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추석에 시골에 가면서 [리어왕]과 [King Lear] 이렇게 달랑 두 권을 챙겨가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틀째 되던날 책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고 있더라. 이유를 물으니 책을 다 읽었는데, 영문판이 진도가 잘 안나가서 읽을게 없으니 패닉 상태에 빠지려 한다는 고백.
내가 챙겨 온 책은 [하이피델리티]와 [인구가 세계를 바꾼다] 였는데, 앞의 책은 큰애가 진작에 읽고 나에게 권해줬던거라서 다시 읽고 싶지 않다며 "그럼 그거라도..." 이러면서 [인구가 세계를 바꾼다]를 집어들었다. 한숨쉬며 내분야가 아닌 책을 읽을지언정 아무것도 안 읽고 있을 수는 없다!! 역시 피는 못속인다.
#2.
시부모님께 큰애는 첫 손주라는 각별함과 함께, 동생을 일찍 봐버린 세살배기를 두분이 두달쯤 데려가서 키워주셨는데 그때문인지 장손인 둘째를 제끼고 아직까지도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조선소 소장을 하고 계셨던때라 제주도로 뚝 떼어가서 진짜 두달동안 난 갓 낳은 둘째만을 데리고 산 적이 있다.
명절 때 모여 앉으면 영낙없이 큰애의 세살 시절 얘기를 하시는데, 특히 할아버지는 큰애를 아직도 세살짜리인양 이뻐하신다. 얼굴이 자그마하다느니, 눈이 크다느니, 손이 작고 예쁘다느니, 요즘 애들답지 않게 복스럽게 생겼다느니(응? 애는 다이어트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데?) 등등.
큰애는 쫌 민망하니까 방으로 들어가버렸고, 지 남친한테 문자를 보내면서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나를 부위별로 예찬하신다고 우스개소리를 했나보다. 거기에 대한 답문자. "나도 그 대화에 끼고 싶다.."
푸하하하. 아무렴. 그래야지. 남자친구면 그정도 멘트는 날려줘야 예의가 있는거지. 그 문자 한 줄로 내게 점수 좀 땄다고 말해주라 그랬다.
#3.
차가 밀려서 차안에서 열시간씩 있는것도 싫고 작은애가 시험공부 운운하며 금요일 자정에 끝나는 언어학원을 절대 빠질 수 없다길래 그냥 작은애가 학교에 가있는 동안에 시골로 가버렸다. 추석 날 아침 차례를 일찍 지내고 둘러 앉아 밥을 먹는데 시어머니의 한마디.
"아이고. 진짜배기가 빠지니까 아무 재미가 없다..우리 장손이 왔어야하는데.."
밥먹던 우리 세식구와 동서네 네식구는 졸지에 가짜배기가 되어버렸다.
가짜배기 계속 밥먹어도 되나싶어 잠시 젓가락이 주춤거렸다.
#4.
김치는 무사히 가져왔다. 집에 있는 진짜배기한테 김치랑 밥줘야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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