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이월의 어느날에.
- 日常茶飯事
- 2008. 12. 24. 00:54
언제부턴가 12월 중순즈음이면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인사이동에 나까지도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아랫사람이었을때는 그저 성실히 일만 열심히하면 그런대로 무탈하게 한 해를 보내고 또 새해를 맞이하곤 했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이제는 일을 잘해내는 건 기본이고 윗사람의 취향에 따라 갖춰야 할것이 점점 더 다양해져가는데, 그 중에서도 필수적인건 '정치적'인 성향이다. 두루두루 잘해야하고, 요즘엔 '뛰어난 유머감각'까지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눈치다. 남편에겐 영업에서 일등을 하라고 요구하는것보다 몇배쯤 어려운 그런 일이다.
이사승진 대상에 들었으나 미끄러진건 그냥 그러려니했다. 오히려 충격적인건 작년에 남편과 같은 직책에 오른 사람이 1년만에 짤린 일이다. 겨우 1년만에 말이다. 능력을 증명해보이지 못하면 가차없이 짤리는 자리까지 갔다는 뜻이기도 하고, 승진 말고는 평행이동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기도하다. 이사는 커녕, 조금만 방심하면 그냥 아웃이다. 남편의 마음부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정치성 제로성향인 상태로 여기까지 왔으니 그건 일로 승부를 한다는 뜻 아니겠냐고 위로를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질 않는 눈치다. 예전 사장님은 남편같이 뚝심있는 스타일도 좋아해서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단독으로 인사권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어제부터 남편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더니, 오늘은 저녁을 먹고나서는, "진짜 우울하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 말에 나랑 큰애가 깜짝 놀랐다. 감정표현을 거의 안하는 사람인데 우울하다고 중얼거리다니..마음이 안좋았다.
그리고나선 큰애가 아르바이트 하는곳이 이렇게 추운 날씨에 대중교통으로 가기엔 좀 험난해서 차로 데려다주는데, 아빠가 왜그러냐고 묻길래, 아빠가 회사일로 마음 부담이 큰것 같다고 말해줬다. 아침엔 악몽을 꾼 얘기까지 하는데..내용은 사장이랑 회의하는 곳에 가야하는데, 차가 하천으로 빠지고, 택시를 잡았으나 너무 낡아서 다시 모범을 잡아타고 간신히 도착했는데 내리려고보니 돈이 하나도 없어서 황당해하다가 잠이 깼다고 했다. 회사일로 얼마나 마음부담이 크면 그럴까 싶으니 진짜 가슴이 아팠다. 큰애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빠를 기쁘게 해드리라고 했다. 가끔 곰세마리 노래랑 춤도 필요하다고도..
집에 와, "한 잔 할래?" 했더니 오뎅바엘 가자고 하여 건대까지 오뎅바를 찾아가 일본청주랑 동경오뎅이라는 걸 시켜놓고, 그냥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얘기해봤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얘기라도 하지않으면 가슴이 꽉 막혀버릴것 같아서... 회사에서는 오십전에 이사승진 못하면 거의 아웃되는 분위기라고.. 이사라는 자리를 두명중 한명한테 주는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나마 아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여유있게 회사생활을 한다고 했다. 소위 L-type(레져형)과 S-type(생계형)의 차이라나? 우린 당연히 생계형이니, 갑자기 사소한 내 일이 너무 미안해지더라. 우리도 일찌감치 내공부에 더 투자해서 교직이나 공무원을 했어야했나봐..라고, 이제와서 말해봤자 하나도 쓰잘데기없는 말들이나 주거니받거니..
저녁을 부실하게 먹은 내가 두잔도 채마시기전에 제정신을 못차리자 오히려 이사람이 술을 도맡아서 마셔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안좋다고 자고 있던 작은애가 집에 없길래 깜짝 놀라서 큰애에게 물어보니 독서실에 갔다고..아빠가 우울해하셔서 엄마가 위로차 한잔하러 나갔다고 말하며 너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빠에게 힘을 좀 실어드리라고 했더니 주섬주섬 책챙겨들고 독서실로 갔다고 한다. 그런 동생에게 자기 카드를 주며 먹고싶은거 있으면 사갖고 가라고 했다는 말을 들으며..우리 애들 진짜 다 컸다는 생각이랑..우린 정말 '가족'이구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평상시에 그닥 애틋할것도 없이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특별히 화목하다는 느낌도 없는 맹숭맹숭한 사람들이었는데, 막상 아빠가 우울해하니 다들 진심으로 마음써주는..그런 가족. 정말 어려운 일이 닥쳐도 서로를 탓하거나 상처주지않고 배려해주며 보듬을 것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우리 가족의 또다른 일면을 발견한 그런 날이었다. 연말에 강원도쪽으로 여행가기로 했는데, 뭔가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글도 횡설수설..그냥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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