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서치의 후예




얼마전에 S랑 잠깐 얘기를 주고받던 중 고미숙의 <호모 쿵푸스>이야기가 나왔다.
제목은 들어봤는데 딱히 읽어볼 계기는 없었던 책이다.
아니 오히려 그이후에 나온 <호모 에로스>가 더 마음이 끌렸었다. 제목이 딱 관심가게 생겼잖아? ^^;


하지만, 내가 책을 고르는 최우선순위는 '친구의 추천'이다.
더구나 그 책을 읽어보고 얘기를 나누고 싶다하니 나의 관심은 갑자기 '고마녀(고미숙)'에게 집중.
검색의 생활화를 모토로 삼고 있으므로(...)
도서관에서 검색을 하니 <열하일기, 웃음과 해학의 시공간>이라는 내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다.
<호모쿵푸스>, <열하일기~>, <기획되지 않은 자유>가 굴비엮듯이 줄줄이 우리집으로 끌려왔다.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은 탁사마(김탁환)를 통해 나의 의식세계로 다시 들어 온 사람이다.
탁사마가 스토리의 소재로 삼는 시대가 정조시대이고,
그중에서도 백탑파이야기인데 그 세번째로 등장한 것이 <열하광인>이다.


물론, 나또한 <열하광인>에 광적으로 반응했고,
그래서 종로3가에서 내려 탑골공원을 지날때면 어르신들을 뚫고 들어가(-_-)
백탑(원각사지 십층석탑)앞에서 기념촬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때도 있었다.


아무튼.
열하일기, 연암, 정조, 박제가, 홍대용, 백동수, 이덕무 등등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관심을 잡아채는 키워드가 되었는데..지난주 갑자기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 299통을 공개하는 기사가 일주일내내 신문지면에 오르내렸다.


정조는 연암일기을 금서로 찍었지만, 정조의 책에 탐닉하는 자세를 보건대 옆에 끼고 읽었을꺼라는데 500원 건다. 정조의 공개된 어찰들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생동감 넘치고 유머러스했다.
배를 잡고 웃었다(令人捧腹), 하하..하고 웃는 한자어, '뒤쥭박쥭'이라는 언문을 섞어쓴 융통성등등..이건 뭐 요즘 시대로 말하면 거의 온라인에서 주고받는 '쪽지' 수준의 격의없는 편지였다.


정조의 편지에 고무되어(니가 왜?) 나의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미쳐야 미친다>를 추가하고,
고마녀의 <열하일기~>는 정독에 들어가고..
탁사마의 <열하광인>은 서재에서 윗층으로 끌려 올라오고..
정조옵빠 덕분에..그야말로 나의 독서목록이 '뒤쥭박쥭'이 된 한 주였다.


뒤쥭박쥭이 된 책읽기 와중에 친구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우정'에 관한 표현이 있어 여기에 옮겨본다.


1.
[대단한 사귐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아도 되고, 두터운 벗은 서로 가까이 지내지 않아도 된다.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그 사람의 덕을 보고 벗을 삼으면 되는 것이다. (.....) 위로 천 년 전의 옛사람과 벗을 해도 사이가 먼 것이 아니요, 만 리나 떨어져 지내는 사람과 사귀어도 사이가 먼것이 아니다] ㅡ <예덕선생전>, 박지원.


2.

[만약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하겠다. 십 년간 뽕나무를 심고, 일 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 실을 물들이겠다. 열흘에 한 색깔씩 물들여 50일 만에 다섯 색을 물들이겠다. 이것을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에게 부탁하여 백 번 단련한 금침으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겠다. 그러고 나서 귀한 비단으로 표구하여 오래된 옥으로 축(軸)을 달겠다. 우뚝이 높은 산, 아득히 흘러가는 강물 사이에 그림을 펼쳐놓고 마주 보며 말없이 있다가, 저물녘에 품에 안고 돌아오겠다.]

 

[좋은 친구가 있는데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지 못하는 심정은 꽃가루를 옮기려고 찾아 드는 나비를 맞는 꽃의 심정과 같다찾아 들면 정성스럽게 맞이했다가잠깐 머무르면 문득 마음 아파하고날아가면 못 잊어 그리워한다] ㅡ<선귤당농소>, <청장관전서>, 이덕무



책을 얘기하면 책을 얘기하고 싶은 친구들이 말을 건네온다.
블로그에선 그런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어떤분이 우리에게 그랬다. '광적인 책읽기'라고.


또 어떤 지인은 '그렇게 무작정 읽어서 뭐할껀데?'라고 묻기도 했다.
나? '그냥 웃지요'로 화답. 안다. 바보같다. 책읽어서 남는것도 없다. 그냥 읽을뿐.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칭한 사람이 이덕무인데, 나도 사방으로 난 窓으로 머리를 돌려가며 하루종일 책을 읽고 싶은 열망에 시달리는걸보면 간서치의 피가 나에게도 한방울쯤 흐르지는 않을까.


책만 읽는 바보들 좀 모여봐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