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라이어T 한가위





1.
일은 매년 하던대로 했는데, 할아버지의 지나친 관심에 지쳐버린 큰애가 아빠한테 쫌 어떻게 해줄것을 강력하게 요청했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애아빠가 그걸 접수하고 할아버지를 아침부터 모시고 나가서 초정리 약수사오기, 약수 사우나에 모시고 가기, 운보선생 작품구경하기 등등을 거쳐 다 저녁때 집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 원천 차단 프로젝트쯤?


돌아 오는 차안에서,
[아빠의 이번 추석 매니지먼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어..음..뭐..나름 괜찮았어요]
[그래. 내년에도 잘 계획을 세워서 긴시간 나들이를 해볼께. 아빤 고충처리반이야. 하하]


본인의 아버지에 대한 불평을 화내지않고, 설교하지않고, 쿨하게 처리한 남편이 올해의 대인배. 남편의 이런점을 사랑합니다.^^



2.
시부모님이 봄부터 마당한쪽에 닭을 기우기 시작했다.
포스가 장난이 아닌 오골계 장닭한마리랑 암탉이 네마리.
근데 얘네가 참으로 시도때도 없이 운다.
 게다가 어느 순간에 암탉들이 꼬꼬댁 꼬꼬꼬꼬...난리도 아니다.
그소리에 시어른이 조카애한테 닭장에 가서 알을 꺼내오라고 시켰다.
알낳으면 저렇게 우는지 처음 알았다.  
따끈한 계란을 꺼내다 계란 후라이반찬했는데,
유정란이라 귀한거고 정말 신선해서 맛있을거라고 권하시지만
기껏 낳아논 달걀 훔쳐먹는 기분이 참 거시기했다. -_-;;



3.
남편의 유머가 일취월장하고있다.


돌아오는 길은 지루했다.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음악을 들었다.
조금뒤에 프로그램 사이에 귀에 익은 찬송가가 차안에 울려퍼졌다.
순간, 기독교방송이었어? 싶은 얼굴로 서로 잠시 눈이 마주쳤다. 할말이 없던 내가


[나, 이노래 알아^^]
라고하자, 남편 曰,
[난 이노래, 가수였어.^^;;]


맞다. 백만년전에 우린 교회를 같이 다닌적이 있던 사이다.



4.
서울에 도착해서 엄마네서 점심겸 저녁을 먹고 집에 와서  퍼져서 쉬고있다가 남편과 좀 걷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우리가 택한 방향은 아차산이나 한강이 아니라 건대방향.


한참을 걷다가 이자까야를 찾는데 마땅찮아서 <라온>이란곳에서 술을 한잔 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명절 뒤풀이인셈이다. 명절날 우리들만의 집으로 돌아와서  술을 한잔 하며 맘을 정리하는게 우리 부부의 오랜 습관이랄까.


소주 두병을 마시고 나와 집으로 가는 줄알았는데 이번엔 Bar에 가서 칵테일 한잔 하잔다.
좋지 모. 내일도 휴일이고. 이번엔 <Seize>.


남편은 항상 블랙러시안, 난 모히토.
모히토는 Woo Bar가 서울시내 최고라지만 여기도 나쁘지않았다.
워커힐 호텔에 가면 데낄라 썬라이즈, W호텔에 가면 모히토를 마신다.
여기 간 지 한참됐네..아들을 유학보냈으니 아껴야한다. 크~.



5.
그러다 거의 자정에 남편이 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신사동에 있던 이친구가 조금뒤 우리가 있는곳에 나타났다.


작년에 '30년만에 만난 중학동창'인 이 친구는 실은 나한테는 일년선배인 그당시 매우 유명했던 학생회장이었다.
뽀얗게 잘생기고 키도 컸던 오빠로 기억한다.


또한번 맞다, 남편은 나의 중학교 1년 선배님이시다.


우와..내가 이선배를
30년도 더 지나서,
자정이 넘은 술집에서,
운동화차림으로 걸으러 나온 쌩얼로,
게다가 남편과 함께 마주앉아 술을 마시다니..이번 추석버라이어티의 정점이다.


어쨌든,
여전히 그나이치곤 잘생긴 마스크에, 좌중을 사로잡는 매너에, 남편과 나를 향해 날리는 적절한 칭찬에 우린, 마셔! 마셔!를 외치며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까지 완전 취해버렸다.



내가 비록 추석전엔 만이틀동안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전부치고 밥하고 송편만들었지만
 이쯤되는 추석 뒷풀이가 있다면 할 만하다.


신선했다. 버라이어티 한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