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특강-철학, 삶을 이끌다.


독서회 7월의 책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였다.


책은 만만치 않았으나 독서회 멤버 한 분이 다같이 완독하자는 의미로 요약본도 올려주시며 독려하여 어쨌거나 무사히 완독할 수 있었고, 난 참 좋았다. 그리고는 미처 책내용을 제대로 음미하거나 정리하기도 전에 8월의 책인 <일리움>이 거의 천페이지여서 그 두께에 떠밀려 책을 읽느라 정신없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광진도서관 인문학 특강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쓴 강신주교수 강의였고 그것도 4주짜리 강의였다.


첫시간은 아직 방학기간이라 낮에 수업이 진행되므로 무리없이 저녁시간에 강의를 들었고 오늘이 그 두번째시간이었는데 오늘은 매우 무리하게 내 수업들을 이리저리 주말로 다 옮겨심어놓고 강의를 들으러갔다. 역시 좋았다.


지난 시간엔 "나는 누구인가-공(空)의 지혜" 였고 오늘은 "사랑이란 무엇인가-사랑의 비극"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어찌나 이해하기쉽고 진솔하게 철학을 풀어나가는지 강의말미에 사람들 몇몇이 정말 솔직하게 자기얘기를 털어놓는걸보고 난 깜짝 놀랐다. 강사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한것 같다. 물론 자기얘기를 그렇게 하는 청중들도 상당히 용기있는 사람들이겠지. 난 죽기전에 한번이라도 그래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주 첫강의에서 '인문학=정직함'이라고 했는데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걸지도. 평소 거짓말을 하는건 아니지만 내주변인들에게  내감정까지 항상 정직해지기에는 난 너무 소심하것 같다.


詩를 읽어주고 강의를 시작하는데 오늘은 황지우시인의 시, <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었다. 여기에 적어두고 싶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그리고 강의 중간에 황지우 시인의 다른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찾아서 읽어주었다.
아...이런. 그 많은 황지우님의 시 중 이 시를 선택하다니.


이 시는 대학교다닐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들 가운데 하나였고 종로2가 뒷골목 어디쯤 이 제목의 카페를 발견한 후로 그곳은 나의 아지트였다. 난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친구를 기다리고 책을 읽었다. 친구를 기다리지 않을때도 커피를 마시러갔고 책을 읽었다. 몇년전엔가는 2월쯤 워커힐을 지나가다가 골프연습장으로 꺾어지는 삼거리 모틍이에 서있던 나무가 나뭇잎을 매달고 있을때는 몰랐는데 잔가지만 잔뜩 갖고 서있는 모습이 마치 예전에 내가 맘속으로 그리던 그 '겨울-나무, 봄-나무' 느낌이어서 차를 세우고 한동안 바라보며 그 詩와 카페를 생각한적도 있었다. 아니. 실은 그 시절의 나를, 내가 만났던 친구들을, 내가 가졌던 깊은 우울들을, 그리고 내가 심취했던 책들, 황지우의 겨울나무처럼 보이지만 이미 생명의 준비를 마친 봄나무를, 황동규시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루이제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의 니나와 슈타인을 생각하고 싶었겠지.


오늘, 그 시가 강신주교수의 목소리로 낭독되었다. 이분은 시를 읽을때는 항상 자리에서 일어서서 낭독을 해주신다. 아주 색다른 감상이었다. 강신주교수의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순간이기도했다. <철학대철학>도 매우 훌륭하다고 독서회대장에게 들은 바 있는데..읽을책이 막 늘어나는군. 읽어야 할 책목록을 쌓아놓고 그 무게에 짓눌려가며 읽는 가학적 책읽기는 내가 즐기는 취미생활중 하나니까, 기쁘다는 뜻이다.


강의가 끝나고 우연히 뒷풀이 장소에 합류하게되었다. 그동안 도친들과 소원했던게 생각나서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는데 오늘 강의를 듣겠다고 따라나선 우리 큰애한테 좀 더 의미있는 기회가 될지도 몰라서 눈딱감고 따라갔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었고 항상그렇듯이 강의이상으로 얻는게 많았다. 난 거의 질문을 안하는 편인데 나도 궁금한걸 하나 물어봤다. 대학원까지 가기에는 좀 부담스럽고 '수유+너머'수준의 인문학강좌도 역시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적절한 인문학 강좌를 아시는게 있으면 소개해달라고했다. 돌아온 대답은 '좋은 사람들과 같이 책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라'였다. 읽으면 소화시켜 배설까지의 과정이 있어야하는데 많은 강좌들이 그냥 먹이기만 한다고. 그건 틀린거라고.


맞는 말씀이다. 그이야길 듣고보니 내가 그동안 광진직독을 통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새삼 깨달았고, 도친들처럼 괜찮은 사람들 곁을 얼마나 오래 떠나있었는지도 기억해냈다. 정말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날이었다.